명·청과 에도 일본
북로남왜와 은 경제에 흔들린 명이 이자성의 난으로 무너지고, 만주의 청이 강희·옹정·건륭 3대에 가장 넓은 영토와 번영을 이룬 시대 — 일본은 전국 시대의 통일을 거쳐 에도 막부의 막번 체제와 쇄국으로, 조선은 두 차례 전쟁 뒤 통신사와 북학으로 이웃과 만났다

Wang Hui · Public domain · 원본
북로남왜와 은 경제에 흔들린 명이 이자성의 난으로 무너지고, 만주의 청이 강희·옹정·건륭 3대에 가장 넓은 영토와 번영을 이룬 시대 — 일본은 전국 시대의 통일을 거쳐 에도 막부의 막번 체제와 쇄국으로, 조선은 두 차례 전쟁 뒤 통신사와 북학으로 이웃과 만났다

Wang Hui · Public domain · 원본
| 구분 | 명·청 | 일본 (에도) | 조선 |
|---|---|---|---|
| 16세기 위기 | 북로남왜 — 알탄 칸·후기 왜구 | 전국 시대, 왜구의 근거지 히라도 | 삼포왜란(1510)·을묘왜변(1555) |
| 세금·재정 | 일조편법(명) → 지정은제(청) | 태합 검지 — 쌀 생산량(고쿠다카) | 대동법·영정법·균역법 |
| 통일 | 누르하치의 여진 통합(1583~) | 노부나가·히데요시의 통일(1590) | 동서 분당(1575), 붕당 정치 |
| 임진왜란 | 원군 파견 → 재정 악화 | 히데요시의 침략 → 도요토미 몰락 | 7년 전쟁, 훈련도감 설치 |
| 새 정권 | 후금(1616) → 청(1636) | 세키가하라(1600) → 에도 막부(1603) | 광해군 → 인조반정(1623) |
| 명·청 교체 | 이자성의 베이징 점령, 청 입관(1644) | 남명·정씨의 원병 요청에 응하지 않음 | 병자호란 뒤 북벌론, 조선 중화 의식 |
| 통치 체제 | 황제 독재 — 청의 군기처 | 막번 체제, 산킨코타이 | 왕과 양반 관료, 비변사 |
| 대외 무역 | 해금 완화 → 광저우 한 곳(1757) | 쇄국 — 나가사키 데지마 | 부산 왜관, 국경의 개시·후시 |
| 조선과의 사절 | 조선의 연행사 (해마다) | 통신사 맞이 (12회) | 연행사·통신사 파견 |
| 서양 학문 | 마테오 리치, 서양 역법(시헌력) | 난학 — 『해체신서』(1774) | 서학 → 천주교 신앙 |
| 학문 | 고증학 (고염무), 『사고전서』 | 주자학(관학), 국학 | 성리학, 실학·북학 |
| 서민 문화 | 『홍루몽』 같은 소설 | 조닌 문화 — 우키요에·가부키 | 판소리·한글 소설·풍속화 |
| 영토·국경 | 타이완·몽골·신장 편입 | 사쓰마의 류큐 침공(1609) | 백두산정계비(1712) |
| 서양의 접근 | 매카트니 사절 거절(1793) | 러시아 락스만 내항(1792) | 신해박해(1791) |
쇼군 아시카가 요시마사의 후계 다툼에 유력 슈고 가문들의 다툼이 얽혀 1467년부터 11년 동안 교토에서 오닌의 난이 벌어졌다. 막부의 권위가 무너지고, 하극상 속에 전국 다이묘가 다투는 전국 시대가 열렸다.
부산포·제포·염포에 살던 일본인들이 쓰시마의 도움을 받아 난을 일으켰다. 진압 뒤 교역이 크게 줄었다.
포르투갈 사람이 탄 배가 일본 다네가시마에 닿아 처음으로 화승총(조총)을 전했다. 조총은 곧 일본 안에서 대량으로 만들어져 전국 시대의 전쟁과 임진왜란의 모습을 바꾸었다.
16세기 중엽 명은 북쪽에서는 알탄 칸이 이끄는 몽골의 침입에, 남쪽 바다에서는 밀무역 상인과 섞인 왜구의 약탈에 한꺼번에 시달렸다. 명은 1570년 무렵 해금을 풀고 몽골과 화의를 맺어 겨우 숨을 돌렸다.
왜구가 배 70여 척으로 전라도 달량포에 쳐들어와 영암·장흥 등을 휩쓸었다. 이를 계기로 비변사가 상설 기구가 되었다.
포르투갈 상인이 명의 허락을 받아 주장강 어귀의 마카오에 머물기 시작했다. 마카오는 중국·일본·유럽을 잇는 무역과 크리스트교 선교의 거점이 되었다.
에스파냐가 필리핀에서 멕시코로 돌아가는 태평양 항로를 찾고 마닐라를 세웠다. 아메리카의 은과 중국의 비단·도자기를 맞바꾸는 갤리온선이 250년 동안 태평양을 오갔다.
만력제 초 10년 동안 수보 장거정이 토지를 다시 재고 관리 기강을 세웠으며, 여러 세금과 요역을 하나로 묶어 은으로 내게 하는 일조편법을 1581년 전국에 시행했다.
오다 노부나가가 1573년 무로마치 막부를 끝내고 조총 부대로 통일의 길을 연 뒤, 그 뒤를 이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1590년 전국 시대를 끝내고 일본을 통일했다.
1592년 일본이 조선을 침략하면서 시작되어 1598년까지 이어진 7년 전쟁. 명나라가 원군을 보내 동아시아 국제전으로 번졌다.
강화 협상이 깨지자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다시 군대를 보냈다. 이듬해 히데요시가 죽을 때까지 이어졌다.
1600년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이시다 미쓰나리의 서군을 꺾고, 1603년 쇼군이 되어 에도에 막부를 열었다. 에도 막부는 1867년까지 260여 년 이어졌다.
예수회 선교사 마테오 리치가 1601년 베이징에 들어가 「곤여만국전도」와 『천주실의』로 서양의 지리·과학과 천주교를 한문으로 알렸다. 이 책과 지도는 사신을 통해 조선에도 전해져 서학이 되었다.
임진왜란 뒤 조선이 에도 막부에 보낸 외교 사절. 1607년부터 1811년까지 열두 차례 일본에 가서 국교와 문화 교류를 이었다.
임진왜란 뒤 조선이 쓰시마와 기유약조를 맺어 일본과의 교역을 다시 열었다. 부산포 한 곳만 열고 세견선을 20척으로 제한했다.
에도 막부는 쇼군의 막부와 다이묘의 번이 땅과 백성을 나눠 다스리는 막번 체제를 짜고, 무가제법도(1615)와 산킨코타이(1635)로 다이묘를 묶었다.
건주 여진의 누르하치가 여진을 통합하고 팔기제를 만들어 1616년 허투알라에서 후금을 세웠다. 아들 홍타이지는 1636년 나라 이름을 청으로 바꾸었다.
1619년 누르하치의 후금이 네 길로 쳐들어온 명군과 강홍립의 조선군을 사르후 일대에서 차례로 무찔렀다. 이 싸움으로 명과 후금의 형세가 뒤바뀌었다.
명의 요청으로 강홍립이 이끄는 조선군을 후금 정벌에 보냈으나, 사르후 전투에서 명군이 크게 지자 강홍립은 후금에 항복했다. 광해군은 명과 후금 사이에서 중립을 지켰다.
후금이 3만 군으로 쳐들어왔다. 인조는 강화도로 피란했고, 후금과 형제의 맹약을 맺고 전쟁을 끝냈다.
청나라가 조선을 침입했다. 인조는 남한산성에서 버티다 삼전도에서 항복했다.
1637년 규슈 시마바라·아마쿠사의 농민과 기독교도가 무거운 세금과 박해에 맞서 봉기해 하라성에서 버텼으나, 1638년 막부군에 진압되었다.
에도 막부는 기독교를 막으려 일본인의 해외 도항을 금하고 1639년 포르투갈 배를 내쫓았으며, 1641년 네덜란드 상관을 나가사키의 데지마로 옮겨 서양과의 무역을 그곳으로만 묶었다.
1644년 이자성의 농민군이 베이징을 점령하자 숭정제가 목숨을 끊어 명이 멸망했다. 곧 오삼계가 산하이관을 열어 청군이 들어와 이자성을 몰아내고 베이징을 도읍으로 삼았다.
청에 볼모로 잡혀갔던 효종이 즉위하자 어영청을 키우고 송시열·이완 등을 등용해 청을 치려는 북벌을 준비했다. 효종이 죽자 중단되었다.
김육의 건의로 서양 천문학을 바탕으로 청에서 만든 역법인 시헌력을 받아들였다.
네덜란드 상선 스페르베르호가 제주에 난파했다. 하멜 일행은 13년 동안 조선에 머물다 탈출했고, 그가 쓴 표류기가 유럽에 조선을 알렸다.
청의 요청으로 조선 조총군이 두 차례 흑룡강 쪽에 나가 남하하던 러시아군을 물리쳤다.
명이 망한 뒤 고염무 등이 경세치용을 내세우며 옛 문헌을 증거로 따지는 방법을 열었고, 이것이 18세기 청에서 경전을 실증적으로 연구하는 고증학으로 꽃피었다.
강희제는 1673년 일어난 오삼계 등의 삼번의 난을 8년 만에 평정하고, 1683년 정씨 세력이 다스리던 타이완을 차지해 청의 중국 지배를 굳혔다.
17세기 말 겐로쿠 연간에 오사카·교토를 중심으로 부유한 상인과 수공업자, 곧 조닌이 즐기는 문학·연극·그림이 꽃피었다.
1689년 청과 러시아가 네르친스크에서 조약을 맺어 스타노보이산맥과 아르군강을 국경으로 정했다. 청이 유럽 나라와 대등하게 맺은 첫 조약이다.
조선 후기 서민의 경제력이 커지면서 판소리·탈춤·한글 소설·사설시조가 유행하고, 김홍도·신윤복의 풍속화와 민화가 그려졌다.
조선과 청의 관리가 백두산에 올라 두 나라의 경계를 정하고 비를 세웠다. 비문의 토문강 해석은 뒤에 간도 문제로 이어졌다.
옹정제는 황제 곁에 군기처를 두어 나랏일을 직접 처리하고, 정세를 토지세에 합쳐 은으로 내게 하는 지정은제를 전국에 넓혔다.
건륭제는 준가르를 무너뜨리고 타림 분지까지 차지해 청의 영토를 가장 넓혔으며, 전국의 책을 모아 『사고전서』를 펴냈다.
1757년 건륭제가 서양 배의 무역을 광저우 한 곳으로 제한하고, 허가받은 상인 조합인 공행만 외국 상인과 거래하게 했다. 이 체제는 아편 전쟁 뒤 난징 조약(1842)으로 끝났다.
데지마의 네덜란드 상관을 통해 서양 학문을 배우는 난학이 일어났고, 1774년 스기타 겐파쿠 등이 네덜란드어 해부서를 번역해 『해체신서』를 펴냈다.
청에 다녀온 박제가가 북학의를 써 청의 문물을 배우고 수레와 배를 이용해 상공업을 일으키자고 했다. 소비가 생산을 자극한다며 절약만을 강조하지 말라고 했다.
박지원이 청 건륭제의 생일 축하 사절을 따라 베이징과 열하에 다녀왔다. 이때 보고 들은 것을 열하일기로 엮어 북학을 주장했다.
1793년 영국의 매카트니 사절단이 열하에서 건륭제를 만나 무역 확대와 상주 사절을 요구했으나, 건륭제는 "천조에는 없는 것이 없다"며 모두 거절했다.

명의 황제(재위 1572–1620). 장거정이 죽은 뒤 오래 조정에 나오지 않았고, 임진왜란 파병 등 만력 3대 정벌과 사르후 패전으로 명이 기울었다



건주 여진의 추장으로 여진을 통합해 1616년 후금을 세운 칸(재위 1616–1626). 팔기제와 만주 문자를 만들고 사르후 전투에서 명을 꺾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