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해군의 중립 외교
명의 요청으로 강홍립이 이끄는 조선군을 후금 정벌에 보냈으나, 사르후 전투에서 명군이 크게 지자 강홍립은 후금에 항복했다. 광해군은 명과 후금 사이에서 중립을 지켰다.
누르하치가 세운 후금이 커지자 명은 임진왜란 때 도와준 은혜를 내세워 조선에 원군을 요청했다(1618). 광해군은 강홍립에게 1만여 명을 주어 보내면서 형세를 보아 대처하라고 일렀다고 전한다. 1619년 사르후 전투에서 명군이 무너지자 강홍립은 후금에 항복하고, 조선이 어쩔 수 없이 출병했음을 알렸다.
광해군은 전쟁 뒤의 복구에 힘써 대동법을 경기도에 실시하고(1608), 양전과 호적 정리를 했으며, 동의보감을 완성시키고 사고(史庫)를 다시 정비했다. 일본과는 기유약조(1609)로 국교를 다시 열었다. 그러나 중립 외교와 영창 대군을 죽이고 인목 대비를 서궁에 가둔 일(폐모살제)은 서인이 인조반정을 일으키는 명분이 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