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화민국과 일본 제국주의
신해혁명으로 선 중화민국이 군벌 분열·5·4 운동·국공 합작과 북벌을 거쳐 일본의 침략에 맞서 싸우고 국공 내전으로 갈라진 시대 — 일본은 다이쇼 데모크라시에서 만주 사변·군부 쿠데타를 거쳐 중일 전쟁과 대동아 공영권으로 치달았고, 식민지 한국은 3·1 운동과 무장 독립 투쟁으로 맞섰다

작자 미상 · Public domain · 원본
신해혁명으로 선 중화민국이 군벌 분열·5·4 운동·국공 합작과 북벌을 거쳐 일본의 침략에 맞서 싸우고 국공 내전으로 갈라진 시대 — 일본은 다이쇼 데모크라시에서 만주 사변·군부 쿠데타를 거쳐 중일 전쟁과 대동아 공영권으로 치달았고, 식민지 한국은 3·1 운동과 무장 독립 투쟁으로 맞섰다

작자 미상 · Public domain · 원본
| 구분 | 중국 | 일본 | 한국 |
|---|---|---|---|
| 1910년대 정치 | 위안스카이 독재 → 군벌 할거 | 다이쇼 정변(1913), 호헌 운동 | 무단 통치 — 헌병 경찰 |
| 제1차 세계 대전 | 21개조 요구 수락(1915) — 국치일 | 칭다오 점령, 21개조 요구 | 토지 조사 사업·회사령 |
| 사상·문화 | 신문화 운동 — 『신청년』·백화문 | 요시노 사쿠조의 민본주의 | 실력 양성 운동·사회주의 수용 |
| 쌀과 식량 | 군벌 전쟁으로 농촌 피폐 | 쌀 소동(1918) → 하라 정당 내각 | 산미 증식 계획(1920) |
| 1919년 | 5·4 운동 — 베르사유 조약 거부 | 파리 강화 회의에서 산둥 차지 | 3·1 운동 → 임시 정부 수립 |
| 공산당 | 중국 공산당 창당(1921) | 일본 공산당(1922) — 비합법 | 조선 공산당(1925) |
| 1923년 | 쑨원·요페 선언 — 소련과 손잡음 | 관동 대지진, 계엄령 | 조선인 학살 — 유언비어 |
| 1925년 | 5·30 운동 — 반제국주의 확산 | 보통 선거법·치안 유지법 | 치안 유지법 시행, 조선 공산당 |
| 통일 전선 | 제1차 국공 합작(1924) | — (공산당 탄압) | 신간회(1927) — 민족 협동 전선 |
| 1926–1928년 | 북벌·4·12 쿠데타 → 난징 국민 정부 | 산둥 출병·장쭤린 폭살(1928) | 6·10 만세 운동(1926)·신간회 |
| 만주 사변(1931) | 9·18 사변, 국제 연맹 제소 | 관동군의 류탸오후 철도 폭파 | 한중 연합 작전 (한국 독립군) |
| 만주국과 국제 연맹 | 리턴 보고서 — 만주국 불인정 | 만주국 수립(1932), 연맹 탈퇴(1933) | 한인 애국단 — 윤봉길 의거(1932) |
| 1930년대 중반 | 안내양외 — 공산당 토벌, 대장정 | 5·15(1932)·2·26(1936) — 군부 대두 | 병참 기지화, 민족 혁명당(1935) |
| 중일 전쟁(1937) | 시안 사건 → 제2차 국공 합작 | 루거우차오 사건, 국가 총동원법 | 황국 신민화, 조선 의용대(1938) |
| 1940년대 | 충칭 정부 항전, 왕징웨이 정권 | 대동아 공영권 → 태평양 전쟁 | 한국광복군(1940)·대일 선전 포고 |
| 1945년 이후 | 국공 내전 → 중화인민공화국(1949) | 항복, 연합군 점령 | 광복 → 남북 분단(1948) |
우창 봉기를 시작으로 혁명이 퍼져 중화민국이 세워지고 청이 무너졌다. 2,000여 년의 황제 지배가 끝나고 중국 역사상 첫 공화국이 섰다.
다이쇼 일왕 때(1912–1926) 일본에서 호헌 운동과 민본주의를 바탕으로 정당 정치와 보통 선거를 요구하는 민주주의 풍조가 퍼졌다.
임시 대총통 자리를 넘겨받은 위안스카이가 국민당을 탄압하고 스스로 황제가 되려다 실패한 뒤 죽자, 중국은 지방 군벌이 다투는 분열 시대로 들어갔다.
제1차 세계 대전 중 산둥의 독일 조차지를 빼앗은 일본이 위안스카이 정부에 산둥·남만주의 이권 등 21개 조항을 요구해 대부분을 받아들이게 했다.
천두슈의 『신청년』을 중심으로 지식인들이 "민주와 과학"을 내걸고 유교 윤리를 비판하며, 말과 글을 일치시키는 백화 문학을 일으켰다.
쌀값이 치솟자 1918년 여름 도야마현 어촌의 여성들에게서 시작된 폭동이 전국으로 번졌고, 데라우치 내각이 물러나 하라 다카시의 정당 내각이 들어섰다.
1919년 3월 1일, 독립 선언서 낭독을 시작으로 전국에서 만세 시위가 일어났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으로 이어졌다.
3·1 운동 뒤 1919년 4월 11일 상하이에서 대한민국 임시 정부가 수립되었다. 민주 공화제를 채택한 첫 정부로, 9월에 여러 임시 정부를 하나로 합쳤다.
파리 강화 회의가 산둥의 옛 독일 이권을 일본에 넘기기로 하자 1919년 5월 4일 베이징 학생들이 톈안먼 앞에서 시위를 벌였고, 반제국주의·반군벌 운동이 전국으로 번졌다.
3·1 운동 뒤 새 총독 사이토 마코토가 "문화 통치"를 내세웠다. 헌병 경찰을 보통 경찰로 바꾸고 한글 신문을 허가했지만, 실제로는 친일파를 길러 민족을 갈라놓으려 했다.
김원봉이 만주 지린에서 의열단을 조직해 일제의 주요 기관을 파괴하고 요인을 암살하는 의열 투쟁을 벌였다.
일제가 일본의 쌀 부족을 메우려고 한국에서 쌀 생산을 늘리는 계획을 세웠다. 늘어난 양보다 많은 쌀이 일본으로 실려 가 한국인의 식량 사정은 더 나빠졌다.
1921년 7월 상하이 프랑스 조계에서 전국 대표 13명이 모여 코민테른의 지원 아래 중국 공산당을 세우고, 천두슈를 최고 책임자로 뽑았다.
1923년 9월 1일 도쿄·요코하마 일대를 덮친 대지진과 화재로 10만여 명이 죽거나 사라졌다. 혼란 속에 "조선인이 폭동을 일으킨다"는 유언비어가 퍼져 자경단과 군경이 많은 조선인을 학살했다.
1924년 쑨원의 국민당이 "연소·용공·부조농공"을 내걸고 공산당원의 개인 입당을 받아들여 공산당과 손잡고, 황푸 군관 학교를 세워 군벌 타도를 준비했다.
서울에서 조선 공산당이 비밀리에 결성되었으나, 그해 11월 신의주 사건으로 드러나 치안 유지법에 따라 많은 당원이 붙잡혔다.
일제가 국체를 바꾸거나 사유 재산 제도를 부정하는 단체를 처벌하는 치안 유지법을 한국에도 적용했다. 사회주의 운동과 독립운동을 탄압하는 도구가 되었다.
1925년 가토 다카아키 내각이 납세액 제한을 없애 만 25세 이상 남자에게 선거권을 주는 보통 선거법을 만들었다. 같은 해 사회주의와 독립운동을 누르는 치안 유지법도 함께 만들었다.
1926년 7월 장제스가 이끄는 국민 혁명군이 광저우에서 북쪽으로 진군해 군벌을 무너뜨렸고, 1928년 베이징을 차지하고 장쉐량이 귀순해 중국을 형식상 통일했다.
비타협적 민족주의자와 사회주의자가 손잡고 신간회를 만들었다. 일제 강점기 최대의 합법적 민족 운동 단체였다.
북벌 중이던 1927년 4월 12일 장제스가 상하이에서 공산당원과 노동자 조직을 무력으로 숙청하고, 4월 18일 난징에 국민 정부를 세웠다. 제1차 국공 합작이 깨졌다.
침체에 빠진 임시 정부를 되살리려고 김구가 상하이에서 한인 애국단을 조직해 의열 투쟁을 벌였다.
1931년 9월 18일 일본 관동군이 선양 근처 류탸오후에서 남만주 철도를 스스로 폭파하고 중국군의 짓이라며 군사 행동을 일으켜, 반년 만에 만주 대부분을 점령했다.
지청천이 이끄는 한국 독립군이 중국 호로군과 연합해 북만주의 쌍성보·사도하자·동경성·대전자령에서 일본군과 싸워 이겼다.
1932년 3월 1일 일본 관동군이 청의 마지막 황제 푸이를 집정으로 앉혀 창춘(신징)을 수도로 한 괴뢰 국가 만주국을 세웠다. 1934년 푸이는 황제가 되었다.
한인 애국단원 윤봉길이 상하이 훙커우 공원의 일왕 생일 겸 상하이 사변 승리 축하식장에 폭탄을 던져 일본군 수뇌부를 죽이고 다치게 했다.
1932년 5월 15일 해군 청년 장교들이 총리 관저를 습격해 이누카이 쓰요시 총리를 살해했다. 이 사건으로 정당 내각 시대가 끝났다.
국제 연맹이 리턴 조사단의 보고서를 바탕으로 만주국을 인정하지 않고 일본군의 철수를 권고하자, 일본은 1933년 3월 국제 연맹 탈퇴를 통고했다.
국민당군의 포위 공격에 장시성 루이진의 근거지를 잃은 중국 공산당의 홍군이 1934년 10월부터 1년 동안 약 1만 2,000km를 걸어 산시성 북부로 옮겨 갔다. 이 과정에서 마오쩌둥이 지도권을 잡았다.
의열단·한국 독립당·조선 혁명당 등이 난징에서 민족 혁명당을 만들었다. 중국 관내 독립운동 세력을 하나로 묶으려는 민족 유일당 운동의 결실이었다.
1936년 2월 26일 육군 황도파 청년 장교들이 1,400여 명의 병력으로 도쿄 중심부를 점거하고 대신들을 살해한 쿠데타 시도. 진압 뒤 통제파가 권력을 잡아 군부의 정치 지배가 굳어졌다.
1936년 12월 12일 장쉐량과 양후청이 시안에 온 장제스를 붙잡아 내전을 멈추고 함께 일본에 맞서라고 요구했다. 공산당의 저우언라이가 중재해 장제스가 풀려났고, 이는 제2차 국공 합작의 계기가 되었다.
중일 전쟁을 일으킨 일제가 "내선일체"를 내걸고 한국인을 일왕에게 충성하는 "황국 신민"으로 만들려 했다. 황국 신민 서사 암송과 신사 참배, 궁성 요배를 강요했다.
1937년 7월 7일 베이핑 근처 루거우차오에서 일어난 충돌을 계기로 일본이 중국을 전면 침략했다. 중국은 국공 합작으로 8년 동안 항전했고, 전쟁은 1941년부터 태평양 전쟁과 하나가 되어 1945년 일본의 항복으로 끝났다.
중일 전쟁이 일어나자 1937년 9월 국민당과 공산당이 다시 손잡고 항일 민족 통일 전선을 만들었다. 홍군은 국민 혁명군의 팔로군과 신사군으로 개편되었다.
1937년 12월 13일 중화민국의 수도 난징을 점령한 일본군이 몇 주 동안 포로와 민간인을 학살하고 성폭행·약탈·방화를 저질렀다.
일제가 국가 총동원법을 만들어 한국의 사람과 물자를 침략 전쟁에 마음대로 끌어다 썼다. 쌀과 놋그릇까지 거두어 가고 젊은이를 전쟁터와 공장으로 끌고 갔다.
김원봉이 중국 국민당 정부의 지원을 받아 한커우에서 조선 의용대를 만들었다. 중국 관내에서 처음 생긴 한국인 무장 부대다.
1940년 일본이 "서양 제국주의로부터 아시아를 해방한다"며 일본·만주·중국과 동남아시아를 묶는 대동아 공영권을 내걸었다. 실제로는 전쟁 자원을 얻기 위한 침략과 지배의 구호였다.
충칭에 자리 잡은 대한민국 임시 정부가 한국광복군을 창설했다. 총사령관은 지청천이었고, 1942년 조선 의용대가 합류했다.
일본 해군 항공대가 하와이 진주만의 미국 태평양 함대를 기습했다. 미국이 참전하면서 전쟁이 태평양으로 번졌다(태평양 전쟁).
미국·영국·중국 정상이 카이로에서 회담하고, 적당한 시기에 한국을 자유 독립시키기로 한 선언을 발표했다. 한국의 독립을 국제적으로 처음 약속했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항복으로 한국이 일제의 지배에서 벗어났다. 북위 38도선을 경계로 미군과 소련군이 들어왔다.
일본이 포츠담 선언을 받아들여 8월 15일 쇼와 일왕이 라디오로 항복을 알렸다. 9월 2일 도쿄만의 미주리호에서 항복 문서에 서명해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났다.
일본이 항복한 뒤 1946년 국민당과 공산당의 전면 내전이 다시 일어났다. 토지 개혁으로 농민을 얻은 공산당이 1948–1949년 세 차례 큰 전역에서 이겼고, 국민당 정부는 타이완으로 옮겨 갔다.
국공 내전에서 이긴 공산당이 베이징에서 중화인민공화국을 선포했다. 국민당 정부는 타이완으로 옮겨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