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사 제도의 변천
9서당 10정에서 2군 6위, 5위와 진관, 5군영, 원수부까지 — 전쟁의 위기마다 새로 꾸린 군대

oreum · CC BY-SA 3.0 · 원본
9서당 10정에서 2군 6위, 5위와 진관, 5군영, 원수부까지 — 전쟁의 위기마다 새로 꾸린 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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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기 | 군사 조직 | 특징 |
|---|---|---|
| 통일 신라 (신문왕) | 중앙 9서당, 지방 10정 | 9서당에 고구려·백제·말갈인 포함 |
| 발해 | 중앙 10위 | 왕궁·수도 경비 |
| 고려 정종 (947) | 광군 30만, 광군사 | 거란 대비, 주현군의 바탕 |
| 고려 (성종 ~ 현종) | 중앙 2군 6위, 지방 주현군·주진군 | 직업 군인(군반씨족), 중방 |
| 고려 숙종 (1104) | 별무반 (신기군·신보군·항마군) | 윤관 건의, 여진 정벌 |
| 고려 무신 정권 | 삼별초 (좌·우별초, 신의군) | 최씨 정권 기반, 대몽 항쟁 |
| 조선 전기 (세조) | 중앙 5위, 지방 진관 체제 | 양인개병, 보법 |
| 16세기 (을묘왜변 무렵) | 제승방략 체제 | 방군수포, 임진왜란 초 패배 |
| 임진왜란 (1593 ~ 94) | 훈련도감(삼수병), 속오군 | 급료병, 양반~노비 함께 편성 |
| 조선 후기 (1682 완성) | 5군영 | 필요에 따라 설치, 붕당의 군사 기반 |
| 개항기 (1881) | 별기군, 5군영 → 무위영·장어영 | 구식 군인 차별 → 임오군란 |
| 대한제국 (1899 ~) | 원수부, 시위대·진위대 | 황제가 군 직접 통솔, 1907 군대 해산 |
신문왕이 전국을 9주로 나누고 5소경을 두어 통일 신라의 지방 제도를 완성했다.
선왕이 대부분의 말갈을 복속하고 요동으로 나아가 최대 영토를 이루고, 5경 15부 62주의 지방 제도를 갖추었다. 당은 발해를 해동성국이라 불렀다.
고려 제3대 왕 정종이 거란의 침입에 대비해 광군 30만을 조직하고, 이를 지휘하는 광군사를 두었다.
고려는 중앙군으로 2군 6위를, 지방군으로 5도의 주현군과 양계의 주진군을 두었다.
여진과의 싸움에서 기병에 밀리자, 윤관의 건의로 숙종이 신기군·신보군·항마군으로 이루어진 별무반을 만들었다.
개경 환도에 반대한 삼별초가 배중손의 지휘로 강화도에서 봉기해 진도와 제주도로 옮겨 가며 3년 동안 고려·몽골 연합군에 맞섰다.
세조가 각 도의 요충지에 거진을 두고 주변 고을의 군사를 묶어 스스로 지키게 하는 진관 체제를 실시했다. 중앙군은 5위로 정비했다.
임진왜란 중 류성룡의 건의로 포수·사수·살수의 삼수병을 기르는 훈련도감을 두었다. 급료를 받는 상비군이었다.
숙종이 금위영을 두어 훈련도감·어영청·총융청·수어청과 함께 5군영 체제가 갖추어졌다.
정조가 왕의 친위 부대 장용영을 두어 도성에 내영, 수원 화성에 외영을 설치했다. 초계문신제로 젊은 관리를 다시 교육했다.
고종이 열두 살에 즉위하자 아버지 흥선대원군이 실권을 잡고 세도 정치의 폐단을 고쳤다. 왕권을 세우고 민생을 안정시키려 했다.
정부가 개화 정책을 맡을 통리기무아문을 두고(1880), 일본인 교관이 훈련하는 신식 군대 별기군을 만들었다(1881).
밀린 급료에 분노한 구식 군대가 들고일어나 일본 공사관을 공격했다. 흥선대원군이 잠시 다시 집권했으나 청군이 그를 붙잡아 갔다.
을미사변 뒤 들어선 김홍집 내각이 태양력 사용, 건양 연호, 종두법, 소학교 설립과 함께 상투를 자르라는 단발령을 내렸다.
대한제국이 "옛것을 근본으로 새것을 참고한다(구본신참)"는 원칙으로 황제권을 강화하고 양전·지계 발급, 상공업 진흥, 근대 시설 도입을 추진했다.
일본이 대한제국 군대를 강제로 해산했다. 시위대 대대장 박승환이 자결하자 시위대가 남대문 일대에서 일본군과 싸웠고, 해산 군인들은 의병에 들어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