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공 내전에서 문화 대혁명까지
1927년 국공 합작이 깨진 뒤 농촌 근거지와 대장정·옌안을 거쳐 내전에서 이긴 공산당이 중화인민공화국을 세우고, 토지 개혁·대약진 운동과 대기근·중소 분쟁·문화 대혁명을 지나 1976년 마오쩌둥의 죽음과 4인방 체포에 이르기까지 — 국민당 정부는 타이완으로 옮겨 갔다

1927년 국공 합작이 깨진 뒤 농촌 근거지와 대장정·옌안을 거쳐 내전에서 이긴 공산당이 중화인민공화국을 세우고, 토지 개혁·대약진 운동과 대기근·중소 분쟁·문화 대혁명을 지나 1976년 마오쩌둥의 죽음과 4인방 체포에 이르기까지 — 국민당 정부는 타이완으로 옮겨 갔다

북벌 중이던 1927년 4월 12일 장제스가 상하이에서 공산당원과 노동자 조직을 무력으로 숙청하고, 4월 18일 난징에 국민 정부를 세웠다. 제1차 국공 합작이 깨졌다.
상하이 쿠데타와 국공 합작의 붕괴 뒤인 1927년 8월 1일, 공산당이 이끄는 국민 혁명군 부대 약 2만 명이 장시성 난창에서 봉기했다. 며칠 만에 도시를 내주고 남쪽으로 물러나 흩어졌지만, 공산당이 스스로 군대를 가진 출발점으로 기념된다.
추수 봉기에 실패한 마오쩌둥이 1927년 징강산에 농촌 근거지를 만들고, 1931년 11월 7일 장시성 루이진에서 중화 소비에트 공화국이 선포되었다. 국민당군의 다섯 차례 포위 공격 끝에 1934년 근거지를 버리고 대장정에 나섰다.
국민당군의 포위 공격에 장시성 루이진의 근거지를 잃은 중국 공산당의 홍군이 1934년 10월부터 1년 동안 약 1만 2,000km를 걸어 산시성 북부로 옮겨 갔다. 이 과정에서 마오쩌둥이 지도권을 잡았다.
대장정 중이던 1935년 1월 구이저우성 쭌이에서 공산당이 정치국 확대 회의를 열어 보구와 오토 브라운의 군사 지도를 비판하고 마오쩌둥을 지도부 핵심으로 끌어올렸다.
1936년 12월 12일 장쉐량과 양후청이 시안에 온 장제스를 붙잡아 내전을 멈추고 함께 일본에 맞서라고 요구했다. 공산당의 저우언라이가 중재해 장제스가 풀려났고, 이는 제2차 국공 합작의 계기가 되었다.
대장정을 마친 공산당 중앙은 1937년 1월부터 10년 동안 산시성 북부의 옌안을 수도로 삼았다. 이곳에서 정풍 운동(1942–1945)으로 당을 마오쩌둥 중심으로 묶었고, 1945년 제7차 당 대회는 "마오쩌둥 사상"을 당의 지도 사상으로 올렸다.
중일 전쟁이 일어나자 1937년 9월 국민당과 공산당이 다시 손잡고 항일 민족 통일 전선을 만들었다. 홍군은 국민 혁명군의 팔로군과 신사군으로 개편되었다.
일본이 항복한 뒤 1946년 국민당과 공산당의 전면 내전이 다시 일어났다. 토지 개혁으로 농민을 얻은 공산당이 1948–1949년 세 차례 큰 전역에서 이겼고, 국민당 정부는 타이완으로 옮겨 갔다.
1948년 9월부터 1949년 1월까지 인민 해방군이 둥베이의 랴오선, 쉬저우 일대의 화이하이, 베이핑·톈진의 핑진 전역에서 잇달아 이겨 국민당군 주력을 무너뜨렸다. 베이핑은 싸움 없이 넘어갔다.
내전에서 진 중화민국 정부가 1949년 12월 타이베이로 옮겨 갔다. 군인과 공무원, 그 가족 등 100만 명 남짓이 대륙에서 건너왔고, 장제스는 1950년 3월 타이베이에서 총통에 복귀했다.
국공 내전에서 이긴 공산당이 베이징에서 중화인민공화국을 선포했다. 국민당 정부는 타이완으로 옮겨 갔다.
1950년 6월 토지 개혁법이 공포되어 1952–1953년까지 전국 농촌에서 지주의 땅을 빼앗아 농민에게 나누었다. 마을마다 열린 "투쟁 대회"에서 많은 지주가 공개 재판을 받고 처형되었다.
중국군이 압록강을 건너 전쟁에 뛰어들자 국군과 유엔군은 다시 남쪽으로 물러났다. 동부 전선의 군과 피란민은 흥남에서 배로 철수했다.
1957년 봄 공산당이 "백화제방·백가쟁명"을 내걸고 지식인에게 당을 비판하라고 권했다. 비판이 거세지자 6월부터 반우파 투쟁으로 돌아서, 공식 집계로 55만여 명이 "우파"로 몰려 직장을 잃거나 노동 개조소로 보내졌다.
1958년 마오쩌둥이 15년 안에 영국을 따라잡겠다며 인민공사와 토법 제철로 대약진 운동을 벌였다. 부풀린 수확 보고 위에서 곡물을 거둬들이고 농사를 망쳐 1959–1961년 대기근이 일어났고, 사망자는 연구에 따라 약 1,500만–4,500만 명으로 추정된다.
스탈린 비판과 평화 공존 노선을 두고 벌어진 중국과 소련의 갈등이 1960년 소련 전문가 철수, 1960년대의 공개 논쟁을 거쳐 1969년 우수리강 전바오섬의 무력 충돌로 번졌다. 이 대립은 중국이 미국에 다가가는 배경이 되었다.
1966년 5월 마오쩌둥이 "부르주아 계급의 대표가 당에 숨어들었다"며 일으킨 정치 운동. 홍위병과 조반파가 당 조직을 공격하고 서로 무장 투쟁을 벌였으며, 류사오치·덩샤오핑 등이 실각했다. 1976년 4인방 체포로 끝날 때까지 10년 동안 사회와 경제가 크게 흔들렸다.
1966년 8월 18일 마오쩌둥이 톈안먼 광장에서 홍위병을 처음 접견한 뒤 학생 홍위병 운동이 전국으로 번졌다. 그해 11월까지 여덟 차례 접견에 1,100만–1,300만 명이 베이징을 찾았고, 홍위병은 "네 가지 낡은 것"을 부순다며 폭력을 휘둘렀다.
1971년 9월 13일 마오쩌둥의 공식 후계자였던 린뱌오가 가족과 함께 비행기로 중국을 빠져나가다 몽골 운두르항 근처에 추락해 모두 죽었다. 중국 정부는 그가 쿠데타 음모가 드러나 달아났다고 발표했으나, 경위에는 아직 풀리지 않은 점이 많다.
미국 대통령 닉슨이 베이징을 방문해 마오쩌둥을 만나고 상하이 공동 성명을 발표했다. 미·중이 화해하며 냉전이 긴장 완화(데탕트)로 접어들었다.
1976년 1월 8일 총리 저우언라이가 죽은 뒤, 청명절인 4월 4–5일 톈안먼 광장의 인민 영웅 기념비에 추모 화환과 시가 쌓였다. 당국이 화환을 치우자 군중이 항의했고, 5일 밤 민병과 경찰이 광장을 정리했다. 사건은 "반혁명 사건"으로 규정되어 덩샤오핑이 다시 실각했다.
1976년 7월 28일 새벽 허베이성 탕산을 규모 7.6(중국 측 7.8)의 지진이 덮쳐 도시가 거의 모두 무너졌다. 공식 사망자는 24만 2,419명이며, 실제로는 더 많았다는 추정도 있다.
1976년 9월 9일 마오쩌둥이 죽고 한 달 뒤인 10월 6일, 화궈펑이 예젠잉·왕둥싱과 손잡고 장칭·장춘차오·야오원위안·왕훙원의 "4인방"을 체포했다. 문화 대혁명은 이것으로 사실상 끝났다.
중국 국민당의 지도자. 북벌로 중국을 통일하고 난징 국민 정부를 이끌며 중일 전쟁을 치렀다. 국공 내전에 진 뒤 타이완으로 옮겨 그곳에서 중화민국을 다스렸다
인민 해방군의 원수. 랴오선·핑진 전역을 이끌었고, 국방부장으로 『마오 주석 어록』을 퍼뜨려 1969년 마오쩌둥의 후계자로 당헌에 올랐으나 1971년 몽골에서 비행기 추락으로 죽었다
인민 해방군의 원수. 6·25 전쟁에서 중국 인민 지원군 사령관이었고 국방부장이 되었으나, 1959년 루산 회의에서 대약진 운동을 비판했다가 실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