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대혁명
다른 이름: 문혁, 무산 계급 문화 대혁명, 5·16 통지, 상산하향, 1월 폭풍
1966년 5월 마오쩌둥이 "부르주아 계급의 대표가 당에 숨어들었다"며 일으킨 정치 운동. 홍위병과 조반파가 당 조직을 공격하고 서로 무장 투쟁을 벌였으며, 류사오치·덩샤오핑 등이 실각했다. 1976년 4인방 체포로 끝날 때까지 10년 동안 사회와 경제가 크게 흔들렸다.

대약진 실패 뒤 류사오치·덩샤오핑의 조정 정책으로 경제가 회복되자, 마오쩌둥은 당과 국가에 "수정주의"가 퍼졌다고 보았다. 1965년 11월 야오원위안이 역사극 『해서 파관』을 비판하는 글을 내놓은 것을 시작으로, 1966년 5월 16일 정치국 확대 회의의 "5·16 통지"가 문화 대혁명을 선포하고 천보다·장칭·캉성·장춘차오 등의 중앙 문혁 소조를 만들었다. 8월 마오쩌둥은 대자보 "사령부를 포격하라"를 써서 류사오치를 겨냥했다.
홍위병이 "네 가지 낡은 것"을 부순다며 사찰·문화재를 파괴하고 교사·지식인·옛 지주 가족을 폭행했고, 1967년에는 상하이의 "1월 폭풍"처럼 조반파가 각지의 당·정부 권력을 빼앗았다. 파벌 사이의 무장 투쟁과, 질서 회복을 내세운 군과 혁명 위원회의 "계급 대오 정리" 같은 숙청에서 특히 많은 사람이 죽었다. 류사오치는 1968년 당에서 쫓겨나 이듬해 갇힌 채 죽었고, 1968년 말부터 1980년까지 1,600만여 명의 도시 청년이 농촌으로 보내졌다(상산하향). 1969년 제9차 당 대회는 린뱌오를 후계자로 당헌에 올렸다.
사망자 추정은 수십만 명에서 수백만 명까지 엇갈린다. 사회학자 앤드루 월더는 지방지를 모아 약 110만–160만 명으로 보았다. 1981년 공산당의 "역사 결의"는 문화 대혁명을 "지도자가 잘못 일으키고 반혁명 집단에 이용되어 당과 국가와 인민에게 심각한 재난을 가져온 내란"이라고 규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