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 기관의 변천
태학과 국학, 국자감과 성균관에서 근대 학교와 조선 교육령까지 — 관리를 기르는 관학과 그 빈자리를 채운 사학

Christian Bolz · CC BY-SA 3.0 · 원본
태학과 국학, 국자감과 성균관에서 근대 학교와 조선 교육령까지 — 관리를 기르는 관학과 그 빈자리를 채운 사학

Christian Bolz · CC BY-SA 3.0 · 원본
| 시기 | 교육 기관·제도 | 특징 |
|---|---|---|
| 고구려 (소수림왕, 372) | 태학(수도), 경당(지방) | 유교 경전, 경당은 글과 활쏘기 |
| 신라 (682 · 788) | 국학(신문왕), 독서삼품과(원성왕) | 논어·효경 필수, 진골 반발로 한계 |
| 발해 (문왕) | 주자감 | 최고 교육 기관 |
| 고려 (성종, 992) | 국자감, 12목에 경학박사 | 유학 교육으로 관리 양성 |
| 고려 중기 (11 ~ 12세기) | 최충 9재 학당·사학 12도 → 관학 진흥 | 서적포(숙종), 7재·양현고(예종), 경사 6학(인종) |
| 고려 말 (공민왕, 1367) | 성균관 중건 | 순수 유학 교육, 신진 사대부 성장 |
| 조선 (1398 ~) | 성균관·4부 학당·향교 (관학) | 생원·진사 입학, 향교는 군현마다 |
| 조선 (1543 ~) | 서원 (백운동 → 소수 서원, 사액), 서당 | 사림의 근거지 → 1871 47곳만 남김 |
| 개항기 (1883 · 1886) | 원산 학사(첫 사립)·육영 공원(첫 관립) | 배재·이화 학당 (선교사) |
| 2차 갑오개혁 (1895) | 교육 입국 조서, 한성 사범 학교·소학교 | 덕양·체양·지양, 근대 학제 출발 |
| 제1차 조선 교육령 (1911) | 보통학교 4년 | "충량한 국민", 일본어·실업 교육 |
| 제2·3차 조선 교육령 (1922 · 1938) | 보통학교 6년, 대학 규정 → 조선어 선택(1938) | 경성 제국 대학(1924), 국민학교(1941) |
소수림왕이 전진에서 온 순도를 통해 불교를 받아들이고, 태학을 세우고, 율령을 반포했다.
신문왕이 유학 교육 기관인 국학을 세웠다. 유교 정치 이념을 익힌 관리를 길러 왕권을 뒷받침하려는 것이었다.
문왕이 당과 친선을 맺고 당의 제도를 받아들여 3성 6부의 중앙 관제를 갖추었다. 대흥이라는 연호를 쓰고 신라도를 열어 신라와 교류했다.
원성왕이 국학 학생의 유교 경전 이해 정도를 상·중·하품으로 나누어 관리 임용에 참고하게 했다.
성종이 최승로의 시무 28조를 받아들여 2성 6부의 중앙 제도와 12목을 갖추고, 국자감을 세웠다.
문하시중에서 물러난 최충이 9재 학당을 열자 사학 12도가 번성했다. 관학이 위축되자 숙종·예종·인종이 관학을 다시 일으켰다.
원·명 교체기에 공민왕이 친원 세력을 숙청하고 쌍성총관부를 되찾는 반원 개혁과, 신돈을 앞세워 권문세족을 누르는 왕권 강화 개혁을 펼쳤다.
한양 천도 뒤 최고 교육 기관 성균관을 세웠다. 서울의 4부 학당, 지방의 향교와 함께 관학을 이루었고, 서당과 서원은 사학으로 교육을 맡았다.
주세붕이 풍기에 첫 서원을 세웠다. 1550년 이황의 건의로 소수서원이라는 이름과 책을 받아 사액 서원의 시작이 되었다.
흥선대원군이 전국의 서원 가운데 47곳만 남기고 모두 없앴다. 앞서 1865년에는 노론의 상징인 만동묘를 철폐했다.
개항장 원산의 주민들이 기금을 모아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 사립 학교인 원산 학사를 세웠다.
미국 개신교 선교사들이 서울 정동에 배재 학당(1885, 아펜젤러)과 이화 학당(1886, 스크랜턴 부인)을 세웠다. 이화 학당은 최초의 근대 여성 교육 기관이다.
정부가 미국인 교사 헐버트·길모어·벙커를 불러 최초의 근대식 관립 학교인 육영 공원을 세웠다.
고종이 교육으로 나라를 세운다는 교육 입국 조서를 내리고, 이어 한성 사범 학교와 소학교를 세워 근대 교육 제도를 마련했다.
조선 총독부가 "충량한 국민"을 기른다는 목적으로 제1차 조선 교육령을 공포했다. 보통학교를 4년으로 하고 일본어와 실업 교육 위주의 낮은 수준의 교육만 허용했다.
이상재 등이 조선 민립 대학 기성회를 만들어 한국인 손으로 대학을 세우려고 모금 운동을 벌였다. 일제의 방해로 실패했다.
3·1 운동 뒤 일제가 제2차 조선 교육령을 공포했다. 보통학교를 6년으로 늘리고 조선어를 필수 과목으로 두었으며, 대학을 세울 수 있는 규정을 마련했다.
중일 전쟁을 일으킨 일제가 "내선일체"를 내걸고 한국인을 일왕에게 충성하는 "황국 신민"으로 만들려 했다. 황국 신민 서사 암송과 신사 참배, 궁성 요배를 강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