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 정책의 변화
북진 통일론에서 판문점 선언까지 — 대결에서 대화로, 공동 성명과 합의서를 거쳐 정상 회담으로 이어진 남북 관계 (2018년까지)

InSapphoWeTrust · CC BY-SA 2.0 · 원본
북진 통일론에서 판문점 선언까지 — 대결에서 대화로, 공동 성명과 합의서를 거쳐 정상 회담으로 이어진 남북 관계 (2018년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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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부 | 연도 | 내용 |
|---|---|---|
| 이승만 | 1950년대 | 북진 통일론, 평화 통일론 탄압 (진보당 사건) |
| 장면 | 1960~1961 | 유엔 감시 남북 총선거, 학생들의 남북 학생 회담 추진 |
| 박정희 | 1972 | 7·4 남북 공동 성명 — 자주·평화·민족 대단결, 남북 조절 위원회 |
| 전두환 | 1985 | 첫 이산가족 고향 방문단·예술 공연단 교환 |
| 노태우 | 1988 | 7·7 선언, 북방 외교 (소련·중국 수교) |
| 노태우 | 1991 | 남북 유엔 동시 가입, 남북 기본 합의서, 한반도 비핵화 공동 선언 |
| 김영삼 | 1994 | 민족 공동체 통일 방안 (화해·협력 → 남북 연합 → 통일 국가) |
| 김대중 | 1998 | 햇볕 정책, 정주영 소 떼 방북, 금강산 관광 |
| 김대중 | 2000 | 첫 남북 정상 회담, 6·15 남북 공동 선언 |
| 노무현 | 2003 | 개성 공단 착공, 경의선·동해선 연결 추진 |
| 노무현 | 2007 | 두 번째 정상 회담, 10·4 남북 정상 선언 |
| 문재인 | 2018 | 4·27 판문점 선언, 9·19 평양 공동 선언 |
김구와 김규식이 남한만의 단독 선거에 반대해 평양에서 북한 지도자들과 회담했으나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평화 통일을 내세운 진보당의 조봉암이 간첩 혐의로 사형되고 진보당이 해체되었다. 2011년 재심에서 무죄가 선고되었다.
4·19 혁명 뒤 의원 내각제·양원제로 헌법을 고치고, 총선거에서 이긴 민주당의 장면이 국무총리가 되었다.
남북이 분단 뒤 처음으로 자주·평화·민족적 대단결의 통일 3대 원칙에 합의해 서울과 평양에서 함께 발표했다.
분단 뒤 처음으로 남북의 이산가족 고향 방문단과 예술 공연단이 서울과 평양을 서로 찾았다.
노태우 정부가 공산권 나라들과 관계를 넓혀 소련(1990)·중국(1992)과 국교를 맺었다.
제46차 유엔 총회에서 남북한이 함께 유엔 회원국이 되었다.
남북이 서로의 체제를 인정하고 불가침과 교류·협력을 약속한 합의서를 채택했다. 이어 한반도 비핵화 공동 선언에 합의했다.
김영삼 정부가 화해·협력, 남북 연합, 통일 국가의 3단계로 통일을 이루자는 민족 공동체 통일 방안을 내놓았다.
정주영이 소 떼를 이끌고 방북한 뒤, 남한 관광객을 태운 배가 동해항에서 금강산으로 떠났다.
분단 뒤 첫 남북 정상 회담이 평양에서 열리고 공동 선언이 발표되었다.
6·15 남북 공동 선언 뒤 남한의 자본·기술과 북한의 땅·노동력을 결합한 공업 단지가 개성에 세워졌다.
노무현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 위원장이 평양에서 두 번째 남북 정상 회담을 열고 남북 관계 발전과 평화 번영을 위한 선언을 발표했다.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국무 위원장이 판문점에서 정상 회담을 열고 한반도의 평화와 번영, 통일을 위한 판문점 선언을 발표했다.
북한의 최고 지도자 (1948–1994). 북조선 임시 인민 위원회 위원장을 거쳐 수상·주석이 되었다. 6·25 전쟁 뒤 반대파를 숙청하고 1인 독재 체제를 세웠다
김일성의 아들, 북한의 최고 지도자 (1994–2011). 1980년 후계자로 공식화되었고, 국방 위원장으로 선군 정치를 내세웠다. 출생 연도를 북한은 1942년으로 적는다
초대 농림부 장관. 1956년 대통령 선거에 나서고 진보당을 만들어 평화 통일을 내세웠다. 진보당 사건으로 1959년 사형되었고, 2011년 재심에서 무죄를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