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화사상의 형성
다른 이름: 개화 사상, 통상 개화론
박규수·오경석·유홍기 등이 북학파 실학을 잇고 청을 거쳐 들어온 서양 사정을 받아들여, 문호를 열고 나라를 부강하게 하자는 개화사상을 폈다. 이들에게 배운 김옥균·박영효·유길준 등이 개화파가 되었다.
19세기 중엽 서양 세력이 밀려오자, 북학파의 이용후생 사상을 이은 일부 지식인은 나라의 문을 열고 서양의 기술을 받아들여 부국강병을 이루자고 생각했다. 박지원의 손자 박규수는 두 차례 청에 다녀와 서양 세력에 맞서 개혁하는 청의 양무운동을 지켜보았고, 흥선 대원군이 물러난 뒤 일본과의 수교를 주장했다(통상 개화론). 역관 오경석은 청을 오가며 위원의 "해국도지", 서계여의 "영환지략"처럼 세계 지리와 서양 사정을 다룬 책을 들여왔고, 중인 의관 유홍기(대치)는 이 책들을 함께 읽으며 개화사상을 키웠다.
1870년대 박규수의 사랑방에는 김옥균·박영효·홍영식·서광범·유길준 같은 젊은 양반 자제들이 모여 배웠고, 유홍기는 "백의정승"이라 불리며 김옥균 등을 이끌었다. 이들은 강화도 조약(1876) 뒤 정부의 개화 정책에 참여해 개화파를 이루었고, 임오군란 뒤 개혁의 속도와 방법을 두고 온건 개화파와 급진 개화파로 나뉘었다. 유홍기는 1884년 갑신정변이 실패한 뒤 자취를 감추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