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1919년 3월 1일

기미 독립 선언과 만세 시위의 확산

민족 대표 33인이 태화관에서 독립 선언식을 열고, 탑골 공원에서 학생과 시민이 독립 선언서를 읽고 만세 시위를 시작했다. 시위는 도시에서 농촌으로, 국외로 번졌다.

기미 독립 선언서 — 민족 대표 33인 이름으로 1919년 3월 1일 발표
기미 독립 선언서 — 민족 대표 33인 이름으로 1919년 3월 1일 발표

민족대표 33人 · Public domain · 원본

천도교·기독교·불교계 대표 33인(천도교 15, 기독교 16, 불교 2)이 고종의 인산(3월 3일)을 앞둔 3월 1일을 거사일로 잡았다. 최남선이 쓴 선언서는 "오등은 자에 아 조선의 독립국임과 조선인의 자주민임을 선언하노라"로 시작하고, 끝에 붙은 공약 3장(누가 썼는지는 한용운설과 최남선설이 엇갈린다)은 질서 있고 평화적인 행동을 다짐했다. 민족 대표들은 태화관에서 선언식을 한 뒤 스스로 경찰에 알렸고, 탑골 공원에 모인 학생과 시민이 선언서를 읽고 거리로 나섰다.

시위는 비폭력을 내건 도시 중심의 시작에서, 상인의 철시와 노동자의 파업으로, 다시 농촌으로 번졌다. 농민들이 장날을 이용해 일어나고 일제가 무력으로 짓누르자 면사무소·헌병 주재소를 습격하는 폭력 투쟁으로 바뀌기도 했다. 간도 용정(3월 13일)·연해주·미국 필라델피아(한인 자유 대회)·일본에서도 만세 시위가 일어났다. 박은식의 "한국독립운동지혈사"는 200만 명이 넘게 참여해 7,500여 명이 죽었다고 적었다.

3·1 운동은 모든 계층이 참여한 최대 규모의 민족 운동으로, 대한민국 임시 정부 수립의 계기가 되었고 일제가 무단 통치를 "문화 통치"로 바꾸게 했다. 중국의 5·4 운동, 인도의 비폭력·불복종 운동 등 아시아의 민족 운동에도 영향을 주었다.

지도에서 보기

1919년의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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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나라와 지도자
일제강점기 조선 — 조선 총독 하세가와 요시미치
일본 · 통치국 — 다이쇼 일왕
관련 장소
태화관 터, 탑골 공원

관련 인물

  • 손병희1861년 – 1922년

    주도자 · 동학 제3대 교주, 천도교를 세웠다. 3·1 운동 민족 대표 33인의 대표

  • 한용운1879년 – 1944년

    참여자 · 승려·시인. 민족 대표 33인으로 기미 독립 선언서에 서명했다. 시집 "님의 침묵"

  • 최남선1890년 – 1957년

    저자 · 기미 독립 선언서를 썼다. 뒤에 친일의 길을 걸었다(『친일인명사전』 수록)

  • 이승훈1864년 – 1930년

    참여자 · 신민회 회원으로 정주에 오산 학교를 세웠다. 105인 사건으로 옥고를 치렀고 3·1 운동 때 기독교 쪽 민족 대표였다

  • 고종1852년 – 1919년

    관련자 · 조선 제26대 왕이자 대한제국 첫 황제

앞뒤 사건

이후 사건
1919년 아우내 장터 만세 시위

이 사건이 든 테마

  • 서울기원전 18년 – 1988년

    한성 백제에서 6월 민주 항쟁까지 — 한강을 차지한 나라가 이긴 땅, 조선 500년의 도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