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얼 허통과 중인의 소청 운동
다른 이름: 신해허통, 정유절목, 중인 통청 운동
조선 후기 서얼과 중인이 관직 진출의 차별을 없애 달라고 집단 상소를 올렸다. 서얼은 정조 때 길이 넓어지고 1851년 크게 허통되었다.
양반의 첩에게서 난 자손인 서얼은 문과 응시가 막히고, 관직에 나가도 오를 수 있는 품계가 제한되었다(한품서용). 조선 후기 서얼은 집단 상소로 차별을 풀어 달라고 요구했다. 정조는 1777년 서얼 허통 절목(정유절목)을 내리고, 규장각 검서관에 이덕무·유득공·박제가·서이수 등 서얼 출신 학자를 등용했다. 철종 때인 1851년에는 신해허통으로 청요직 진출의 길이 열렸다.
기술직과 행정 실무를 맡던 중인도 이에 자극받아 1851년 대규모 소청 운동을 벌여 청요직 진출을 요구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중인들은 시사(詩社)를 만들어 위항 문학을 일으키고 "소대풍요"·"풍요속선" 같은 공동 시집을 펴냈다. 역관 등은 청을 오가며 새 문물을 익혀 개화사상의 한 흐름을 이루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