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디의 비폭력·비협조 운동
다른 이름: 비협조 운동, 사티아그라하 운동, 킬라파트 운동
간디와 인도 국민 회의가 영국 상품·학교·법원·관직을 거부하는 비폭력·비협조 운동을 벌였다. 힌두교도와 이슬람교도가 함께한 첫 전국적 대중 운동이었다.

작자 미상 · Public domain · 원본
남아프리카에서 인도인 차별에 맞서며 사티아그라하(진리 파지)라는 비폭력 저항을 다듬은 간디는 1915년 인도로 돌아왔다. 롤럿법과 암리차르 학살, 그리고 전쟁 뒤 영국이 내놓은 개혁(1919년 인도 통치법)이 자치와 거리가 멀자, 1920년 국민 회의는 간디가 제안한 비협조 운동을 받아들였다. 영국이 준 작위·관직을 내놓고, 관립 학교와 법원·선거를 거부하며, 영국산 옷감 대신 손으로 짠 인도 옷감(카디)을 입자는 것이었다. 간디는 물레(차르카)를 돌리며 스와데시(국산품 애용)를 몸소 보였다.
오스만 제국의 칼리프 지위를 지키려던 이슬람교도의 킬라파트 운동도 함께하면서, 운동은 도시의 지식인을 넘어 농민과 노동자까지 끌어들인 인도 최초의 전국적 대중 운동이 되었다. 수만 명이 감옥에 갔고, 영국 상품 수입이 크게 줄었다.
그러나 1922년 2월 차우리차우라에서 성난 군중이 경찰서에 불을 질러 경찰 20여 명이 죽자, 간디는 비폭력의 원칙이 무너졌다며 운동을 멈추었다. 간디는 곧 체포되어 6년형을 받았다. 운동은 목표를 이루지 못했으나, 국민 회의를 대중 정당으로 바꾸고 간디를 인도 민족 운동의 지도자로 세웠다.